영원한 진보의 아이콘, 노회찬의 삶과 정치: 아주 쉽게 이해하는 프로필
목차
- 청년기: 노동운동가로 세상과 만나다
- 정계 입문과 진보정당의 역사
- ‘촌철살인’ 논객, 그의 의정 활동
- 만인의 가슴에 남은 정치인, 노회찬
1. 청년기: 노동운동가로 세상과 만나다
부산 출생, 학창 시절과 진보적 사유의 싹
노회찬(魯會燦, 1956년 8월 31일 ~ 2018년 7월 23일)은 부산 초량동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도 어머니의 권유로 첼로를 배우는 등 예술적 감성을 키웠고, 이는 훗날 그의 날카로운 비판 속에 따뜻한 인간미를 담아내는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경기고등학교와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그는 학창 시절부터 사회 모순에 깊은 관심을 가지며 유신 독재에 반대하는 활동을 전개하기도 했습니다.
용접공 노회찬, 노동 현장에 뛰어들다
대학 졸업 후 1980년대 초, 그는 소위 ‘위장 취업’이라는 방법으로 산업 현장에 뛰어듭니다. 1983년 전기용접기능사 2급 자격증을 취득하고 서울, 부천을 거쳐 인천에서 용접공으로 일하며 실제 노동자들의 삶과 마주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경험이 아닌, 그의 평생 정치적 신념의 뿌리가 된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1987년에는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을 창립하는 등 인천 지역 노동운동을 이끌며 활발하게 활동했고, 이로 인해 7년여의 수배 생활과 옥고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는 노회찬이 이론가와 실천가로서의 면모를 동시에 갖추는 결정적인 시간이었습니다.
2. 정계 입문과 진보정당의 역사
진보정치의 기틀을 다지다
노동운동을 통해 진보적 가치 실현에 헌신했던 노회찬은 199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진보정당 건설에 힘을 쏟았습니다. 1993년 ‘진보정당추진위원회’를 거쳐 1995년 ‘진보정치연합’ 대표로 활동했습니다. 1997년 대선 기구였던 국민승리21의 정책기획위원장을 맡아 진보진영의 결집을 시도했으며, 이는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그는 민주노동당에서 부대표, 사무총장 등 주요 직책을 역임하며 당의 뼈대를 세우는 데 기여했습니다.
3선 국회의원으로서의 발자취
노회찬은 총 세 번의 국회의원 임기를 수행하며 대한민국 진보정치의 상징적인 인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 제17대 국회의원 (2004년, 비례대표): 민주노동당 소속으로 당선되며 ’50년 낡은 판을 갈자’는 구호와 함께 국회에 입성했습니다. 당시 10명의 진보정당 의원들과 함께 ‘거대한 소수’의 정치를 표방하며 사회적 약자의 권리 향상에 집중했습니다.
- 진보정당의 분화와 재결합: 민주노동당 내 이념적 갈등으로 인해 2008년 진보신당 창당에 참여하여 대표로 활동했고, 이후 정의당의 전신인 진보정의당 공동대표 등을 역임하며 진보정치의 험난한 길을 걸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삼성 X파일 사건’의 ‘떡값 검사’ 명단 공개로 기소되어 의원직을 상실하는 시련을 겪기도 했습니다.
- 제19대 국회의원 (2012년, 서울 노원구 병): 통합진보당 소속으로 재선에 성공했으나, ‘삼성 X파일 사건’ 관련 대법원 판결로 인해 2013년 의원직을 다시 상실했습니다.
- 제20대 국회의원 (2016년, 경남 창원시 성산구): 정의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경남 ‘진보정치 1번지’라 불리는 창원 성산구에서 당선되며 세 번째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습니다. 이는 그가 노동자 계층과 지역 주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음을 보여줍니다.
3. ‘촌철살인’ 논객, 그의 의정 활동
시대를 꿰뚫는 명연설과 비판
노회찬은 국회에서 특유의 날카로운 통찰력과 유머 감각을 겸비한 발언으로 ‘촌철살인’ 논객으로 불렸습니다. 그의 연설은 본질을 꿰뚫으면서도 대중의 공감을 얻는 힘이 있었습니다. 특히, 국회 대정부 질문이나 상임위원회 발언 등에서 보여준 그의 논리적인 비판과 재치 있는 비유는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일례로, 6411번 버스에 탑승한 새벽 노동자들의 고단한 삶을 조명하며 그들의 존재를 우리 사회에 일깨워준 연설은 오랫동안 회자되는 명연설 중 하나입니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입법 활동
그의 의정 활동은 일관되게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권리 향상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제17대 국회의원 시절에는 호주제 폐지 법안을 대표 발의하는 등 시대적 과제를 선도적으로 이끌었으며,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안 발의를 통해 장애인 단체의 숙원을 해소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또한, 중소 자영업자들의 이익을 침해하는 불합리한 신용카드 수수료 인하 운동을 전개하는 등 ‘거대한 소수’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데 망설임이 없었습니다.
투명한 권력 감시자로서의 역할
노회찬은 권력 기관의 부패와 비리를 감시하는 데도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그는 ‘삼성 X파일 사건’에서 불법 도청 내용을 공개하며 우리 사회의 특권층 카르텔을 고발했고, 사법 개혁과 고위공직자 비리 수사를 위한 상설특검 도입을 촉구하는 등 ‘정치가 정의로울 수 있음’을 몸소 실천하고자 했습니다. 이는 그가 ‘만 명에게만 평등한 사법 현실’을 비판하며 모든 국민에게 평등한 법 집행을 요구했던 신념의 발로였습니다.
4. 만인의 가슴에 남은 정치인, 노회찬
팟캐스트 활동과 대중과의 소통
노회찬은 국회의원직을 잠시 떠나 있던 시기에 팟캐스트 방송 《노유진의 정치카페》를 진행하며 대중적 인기를 얻었습니다. 유시민, 진중권과 함께 진행한 이 프로그램에서 그는 깊이 있는 정치 분석과 함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며 ‘진보정치인’이라는 틀을 넘어 대중과 적극적으로 소통했습니다. 그의 재치와 입담은 많은 청취자에게 정치에 대한 흥미를 유발하고 진보적 가치에 공감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비극적인 사망과 남겨진 유산
2018년, 노회찬 의원은 ‘드루킹 댓글 조작 사건’ 관련 특검 수사를 받던 중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비극적인 선택은 많은 국민에게 충격과 슬픔을 안겼으며, 그가 평생 추구했던 ‘정의로운 정치’에 대한 열망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했습니다. 유서에서 그는 금품 수수 사실은 인정했지만 청탁과는 무관하며, 어리석은 선택에 대한 책임과 함께 “이 땅의 정의가 바로 서기를 염원”한다는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그의 사망 후, ‘평등하고 공정한 나라 노회찬재단’이 설립되어 그의 정신과 유지를 기리고 있습니다. 재단은 노회찬상을 제정하여 사회적 약자의 권리 확대와 평등 및 공정 실현에 기여한 개인이나 단체를 격려하며, 그의 삶의 가치였던 평등과 정의를 우리 사회에 실현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노회찬은 단순한 정치인을 넘어, 노동과 서민의 편에 서서 불의에 맞섰던 ‘영원한 진보의 아이콘’으로 대한민국 현대사에 깊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그의 말과 행동은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에게 ‘정치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과 울림을 던져주고 있습니다.